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하나 있다. 그 영화는 바로 <중경삼림>이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는 금성무의 비주얼에만 주목하며 푹 빠져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중경삼림>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1에서는 임청하와 금성무가 나온다. 사랑하는 여자인 메이를 잊지 못하고 파인애플 통조림을 5월 1일의 날짜까지 사고 개봉하는 하지무. 그리고 달리는 그의 모습. 세상이 모두 다 하나로 이어진 길인듯 나는 하지무에 대한 미칠 듯 한 애정과 아픔을 느꼈다. 하지무를 사랑하고 싶어졌다. 바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겠다는 다소 술에 취한 그의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다짐에 함께 취한 것도 아니다. 그 나름의 용기에 나도 함께 용기를 냈다는 게 맞겠다.
그는 파인애플을 여러 번 강조한다.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라는 말로 자신의 좋은 예감을 대신했다. 그것도 여러 언어로. 파인애플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파인애플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녀와 여전히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고 새로운 사랑에 대한 존재감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에게 옆에 있어도 되냐며 말하는 하지무의 모습에서 나는 조금 슬퍼졌다. 그녀는 그와는 다르다. 파인애플로 통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처럼 실연을 당하고 조깅을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생각한다.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한 사람이 내일은 파인애플이 아닌 다른 걸 좋아할 수도 있다고.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리고 사람도 계속 변하고 또 변한다. 아무리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초지일관의 자세로만 항상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영화 속에 나오는 동전을 넣고 원하는 음악을 선택해 플레이하는 기계가 지금은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쉬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정말 쉬고 싶다는 걸 알게 된 후 하지무가 우적우적 씹어 먹던 샐러드들은 괜히 처연해 보일 정도로 그의 감정이 바다위에 떠있는 돛단배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오는 날 조깅을 하고 삐삐를 버리려고 돌아서는 그의 귀에 들리는 삐삐의 메시지. 그 메시지 속에는 그녀가 남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들어있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생일 축하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그에게는 아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그에게 기억하고 싶은 사람으로 각인된 것이다. 그렇게 한 마디의 말로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깊게 자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란 동물은 참으로 감성적이다. 유통기한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만년 후로 하고 싶다던 하지무의 모습에서 나는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짐을 느꼈다.
에피소드2는 양조위와 왕비가 나오는데, 한때 에피소드1보다 더 애정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기분 좋게 남아있다. 우울할 때면 한 번씩 들춰보았던 에피소드2. 에피소드1보다는 덜 아련하고 편한 자세로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에피소드는 시작과 함께 잔잔하게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흘러나온다. 그리곤 경찰 633의 모습을 비춰줌과 동시에 노래 소리는 커진다. 시끄러우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다던 페이의 모습. 노래에 맞춰 리듬을 타며 일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자꾸만 아른거린다. 몇 해 전, 어떤 조개구이 집을 갔는데 에피소드2에서 왕비가 부른 '몽중인'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와서 혹시 '캘리포니아 드리밍'도 있냐며 청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에피소드2하면 '캘리포니아 드리밍'이라는 공식이 내게는 암묵적으로 정해져있었다. 그 노래는 에피소드2를 관통하고 있어서 기억 속에서 맴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633이 사갔던 샐러드와 생선튀김은 묘하게 633의 전 여자 친구와 미래의 여자 친구가 될 페이의 모습을 드러내주고 있다. 항상 습관적으로 고집하던 샐러드는 전 여자친구, 새롭게 사본 생선튀김은 페이. 그는 알았을까. 그를 중심으로 샐러드와 생선튀김이 가지는 무언의 상관관계를. 비행기를 타면 꼭 마음에 드는 스튜어디스가 있다고 25000만 피트 상공위에서 그녀를 유혹했다는 633. 비누와 수건 등에게 말을 걸며 힘을 북돋아주려는 633의 모습은 지금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실연후의 모습과 닮아있다. 항로가 바뀐 비행기는 그의 좌석을 취소한 채 홀연히 떠나버리고, 그런 그의 삶에 스며들듯 페이가 다가온다. 633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곤 했던 페이는 그에게 자신의 출입을 들키고도 꿋꿋하다. 그런 꿋꿋함이 결국은 열매를 맺게 되고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그녀가 즐겨듣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현실이 되는 순간, '캘리포니아 드리밍'이란 노래가 그들 사이에서 큰 화학작용을 했음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캘리포니아 드리밍'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살며시 리듬을 타는 내 모습에서 나도 누군가의 페이가 되리라는 기분 좋은 상상이 든다.
<중경삼림>. 보고 또 보아도 아름다운 이 작품을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있다면 나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틀어놓고 그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정할 것이다.